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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뇌터 탄생 133주년 기념 구글 두들(google doodle)

구글을 네이버보다 더 자주 사용하게 된 뒤로, 그게 일년이 넘어가며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구글 두들이 보이는 것을알게 된 뒤로는

과연 오늘의 메인은 무엇일까 기대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2015년 3월 23일)은 독일 출신 여성 수학자 에미 뇌터의 탄생 133주년을 기념한 두들이 등장했다!

(위 사진 클릭시 '에미 뇌터' 구글 검색 화면이 나옵니다!)

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는 부끄럽게도 사실 그녀의 이름을 이번에 처음 보게 되었지만..

그래서 이렇게 많은 수학자의 탄생일마다 두들로 다뤄주는 구글이 어찌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대수학의 환론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하니 전공책을 다시 봐야겠다.

물리에서도 업적이 커서 

아인슈타인은 그녀를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조적인 수학 천재이다."라고 했단다.


다음은 위키백과에서 검색한 에미 뇌터의 생애와 업적.

생애

에미 뇌터는 독일 바이에른 주 에를랑겐에서 유대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막스 뇌터 또한 수학자로 에를랑겐 뉘른베르크 대학교의 우수한 교수였다. 프리츠 뇌터는 그의 남동생이다.[1]:165,290

뇌터는 어린 시절 특별히 수학적인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다. 10대 때의 그녀는 음악과 춤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에를랑겐 뉘른베르크 대학교는 여성이 등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뇌터는 특별히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결국 1904년, 에를랑겐 뉘른베르크 대학교가 여성의 등록을 허용하자, 뇌터는 즉시 수학과 학생으로 등록되었다. 그녀는 1907년 파울 고르단의 아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뇌터는 논문들로 인하여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뇌터는 1915년 독일의 괴팅겐으로 이사하였지만, 괴팅겐 대학교는 뇌터가 강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뇌터의 친밀한 동료였던 다비트 힐베르트는 뇌터의 이름 대신 그의 이름으로 된 강의를 뇌터가 맡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그런 강의들을 선전해 주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대학 내에서는 논쟁이 생겼는데, 여성이 교수직을 맡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병사들이 귀환하였을 때 여교수 아래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는 처지를 깨달았을 때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물으며 뇌터를 공격했다. 또한, 교수로서의 임용은 대학 평의원회에서의 투표권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대해 다비트 힐베르트는 "교수 후보자의 성별이 그녀의 교수 자격을 허가하는데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대학 평의원회는 대중 목욕탕이 아니다." 라고 항변하였고, 결국 1919년 그녀는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에드문트 란다우는 뇌터를 "[유명한 수학자] 막스 뇌터의 딸"이라고 소개하는 대신, "막스 뇌터가 에미 뇌터의 아버지이다"라고 소개하였다.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유대인이었던 뇌터는 나치 인종차별법에 의하여 학부 강의를 맡는 것이 금지되었다. 뇌터는1933년 독일에서 탈출하여, 미국에서 브린 마르 대학(Bryn Mawr College)의 교수가 되었다. 뇌터는 1935년 4월 14일에 명백하지 않은 정황 속에서 사망하였다. 뇌터의 의사는 수술을 권고하였고, 그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브린 마르의 대학 휴일에 수술 일정을 잡았는데, 수술 중 또는 직후 사망하였다고 한다. 뇌터는 평생 미혼이었고, 미국에는 그녀의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뇌터는 브린 마르 대학의 캠퍼스에 위치한 토마스 그레이트 홀의 안뜰에 묻혔다.

그녀의 남동생인 독일 수학자 프리츠 뇌터는 1934년에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탈출했다. 그는 1941년 10월 10일, 소비에트 연방의 도시인 오룔에서 반-소비에트 선전 활동을 했다는 죄로 총살당하였다.

업적

(출처 : 위키백과)

그 시대의 여성 수학자가 그렇듯 왠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탄생 133주년을 기념할 정도로 큰 업적을 남긴 그녀가

너무 부럽고 존경스럽다. 


ps. 오늘은  라플라스의 생일이기도 하단다.